본문 바로가기
역사 덕후

중국 농사 스타일로 인한 권력과 철학의 유착에 관하여

by 아눈나키1 2023. 4. 15.

춘추전국시대에 중국에서는 도시  전쟁이 격심해졌습니다. 이에 따라 각지의 지배자가 부국강병에 이바지하는 통치원리를 추구했습니다. 그로 인해 나라의 통치와 번영을 위한 학술을 설파하는 학자(제자백가)가 배출되었습니다. 최초 혹은 시초로 볼 수 있는 유가의 창시자 공자는 조상숭배를 근간으로 가족애의 관점에서 사회의 성립을 사유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권력과 이어집니다. 

 


조를 재배한 중국의 특징

 

 

최초로 벼농사를 시작했다는 중국은 조와 벼를 주로 재배하였는데 이는 소가족 단위로 재배할 수 있기 때문에 가족이 사회의 기초 단위로 보게 됩니다. 중국이 가족 중심의 우덜끼리 마인드가 강하고 그로 인해 비리가 팽배한 것도 모두 조를 재배한 것과 연관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공자가 강조한 가족애 

 

공자가 근본이념으로 설파한 인은 가족애이므로 권력자가 자기 일족에게 이익을 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고 이는 부패와 타락으로 이어졌습니다. 제가, 치국. 평천하처럼 공자는 국가나 세계가 가족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밖의 사상가

 

반면 법가는 엄격한 법에 의한 질서 확립을 주장했습니다. 겸애라는 무차별적 애의 실현을 설파한 묵자는 유가 사상이 내포하는 본질적인 약점을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유가는 그 후 성선설의 맹자, 성악설을 설파하고 예를 중시한 순자의 유파로 갈라졌습니다.

 

 

 

무위자연설을 설파한 노자와 만물은 모두 똑같다고 보는 만물제동설을 설파한 장자의 도가는  권력을 위해 봉사하는 학문을 바라보는 지식인의 냉철한 비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제자백가는 이후 중국 사상의 원류가 되는데 특히 유가는 오랜 기간에 걸쳐 중화 제국을 지탱하는 이념적 지주 역할을 했습니다. 이렇듯 중국에서는 가족, 부족의 테두리를 뛰어넘은 국가의 형성이 최대과제였기 때문에 현실적이고 정치색이 강한 사상과 학문이 요구됩니다.

반응형

댓글